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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TA/Достигай идеала

영영 돌아오지 않을 봄.

엔디미오 2017. 7. 21. 12:24



분명 연례행사가 없는 날인데, 본가에서 호출령이 내려왔다. 겨울 방학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제 막 고등학교 2학년생이 되는 그녀는 준비해야하는게 너무나도 많았기에 웬만해선 거절하려했다. 그 목소리만 아니였다면, 말이다.

ㅡ이야기를 하고싶네요, 오토즈키.

수화기 너머로 들린 그 목소리는 방금전까지 자신에게 호출령을 내린 식솔의 목소리가 아닌, 오라버니의 목소리였기에 오토즈키는 끊으려던 전화를 양손으로 쥐곤 제 목소리가 기대로 떨리는지도 모르고 입을 열었다.

"코우즈키 오라버니, 오라버니인가요? 오라버니?"

ㅡ네, 당신이 그렇게나 찾는 그 오라버니입니다.

여전히 여유롭고 어딘가 나른한듯한 목소리는 그의 목소리가 맞았기에, 그녀는 재빨리 옷을 껴입곤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다시 전화기의 화면을 봤지만, 전화는 이미 끊긴 상태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1년만에 그의 얼굴을 곧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것이 위안이 되었다.

길게 통화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용건만 전하면 되는 것일 뿐더러, 직접 이야기하게 될 사실이니.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네무이는 제 자리인 상석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젊게는 50대, 가장 늙은 노인은 90대까지. 열댓명의 노인들이 앉아있는 이 공간은 일반인이라면 감히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할정도의 위압감으로 가득했지만, 이미 어릴적부터 이런 분위기엔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차기 가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어르신들께 죄송하단 말씀부터 올리고자 합니다."

테이블을 미리 치워둔 상석엔 아무것도 없었고, 네무이는 말을 꺼내자마자 정좌 자세로 앉아있던 그대로 엎드렸다. 도게자 자세. 다시 본가로 내려오며, 네무이가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방법이였다. 자신이 어디 한번 해보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인 아이와의 약혼이였다. 어르신들이 꽤나 반대했지만, 자신의 의사를 물었을때 확고히 싫다고 답하지 않아서 이뤄진 산물이였다.

"코우즈키家의 유일한 핏줄인 제가, 아무래도 후계 핏줄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코우즈키 네무이는. 여성이 아닌 남성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요컨대 청천벽력같은 말에, 몇몇 노인들은 마시던 찻잔을 손에서 떨구었다. 몇몇 노인들의 가발은 벗겨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얼굴엔 경악만이 조각한 것 마냥 새겨져있었다. 여전히 도게자 자세로 이마를 바닥에 박고있는 네무이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여성으로, 것도 가문의 친척아이로 약혼까지 한 유일한 본가의 핏줄이 지금 '남성을 마음에 담았다'고 선포했다.

"에이잉, 쯔쯧... 이래서 아이는 멀리 혼자 보내면 안되는거였어! 역시 중학교까지 근처로 다닌 것 처럼, 고등학교도 근처로 보냈어야했다고!"
"여성도 아니고 남성을... 그것도 약혼녀가 있으면서 이러는건..."
"아무래도 어멈이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해서 그런게 분명-"

어머니까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네무이는 바닥에 박고있던 고개를 들곤 외쳤다.

"어머니는!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근 19년간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아이의 격노에 노인들은 입방아를 찧던걸 멈추곤 동그래진 눈으로 네무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네무이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건 아야나기에서 배워, 꽃피워낸 네무이만의 재능 중 하나였다.

"다들 그만하거라."

톡톡 소리와 함께, 가장 늙은 백발의 노인이 들고있던 담뱃대의 재를 털며 여태까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가문의 최고령 지식인이자, 모두가 한입모아 말하곤 하는 통칭 할머님이였다.
그녀는 네무이를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고등학교에서 소중한 것은 많이 얻어왔느냐."

경험, 지식, 성공과 실패, 추억,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그녀가 그 모든걸 한마디로 압축해 물어보자, 네무이는 고갤 한번 가벼이 끄덕이곤 답했다.

"덕분에 많이 얻었습니다, 할머님."
"그러면 되었느니라. 고등학교는 상경시켜 가르치길 잘했구나."

역시 나의 선택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구나.

노년의 여인 답지 않게 호쾌히 껄껄 웃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청량감을 선사했기에, 노인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네무이와는 반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느정도 시원하게 웃었는지, 재를 털어낸 담뱃대를 손으로 걸쳐놓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간해선 우리 증손자는 그리 쉬이 마음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건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마음에 품은게냐?"

할머님의 질문에 네무이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조차 없이,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마치 눈보라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눈보라 속에서 가만히 기다려보면, 언제 불었냐는듯 멈춥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설원이 눈앞에 장엄히 펼쳐지죠."

저는 그런 사람을, 그런 사랑을 하고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임에도, 그녀는 재차 껄껄 웃으며 담뱃대로 네무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래, 네가 드디어 제 감정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구나!"

모두 듣거라! 이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떻게 이 집안에서 살아왔느냐. 제 감정을 최대한으로 억누르곤, 욕망마저 없는듯 살아오지 않았느냐!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것이 노래였느니라. 그 노래를 배우러 상경을 보냈더니, 드디어 가장 중요한걸 배워오지 않았느냐!
그녀의 외침에, 모든 노인들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리기만 했던 아이에게 여러가지를 강요해왔고, 아이는 군말없이 모든걸 해내왔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은줄로 알고 계속해서 강요하기만 해왔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제 인생을 찾아갈 수 있도록 상경을 보내는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것이 바로 그녀였다.

"오토즈키! 오토즈키 스즈네! 거기에만 있지 말고 이리 오너라!"

움찔. 만약 행동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정도로 심히 당황한 여자아이가 조금만 열려있던 문을 완전히 열곤 들어왔다. 어느정도 이야기를 문틈 사이로 듣고있었는지, 꽤나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색에 네무이는 정좌 자세 그대로 팔을 살짝 들어올려 자신쪽으로 손짓했다. 그 손짓에 어디에 앉아야할지 몰라, 당황해하던 소녀는 쪼르르 달려와 냉큼 그 옆자리에 앉았다.

"일단 여기에서의 이야기가 끝나면 따로 이야기하도록 할까요."

몸을 살짝 오토즈키쪽으로 기울여 귓가에 속삭인 뒤, 네무이는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허나 속삭임에 마음이 두근거린 소녀는 얼굴이 살짝 붉어져선 고갤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제가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게 된건, 이 이야기와 더불어 약혼을 파기하기 위해 찾아온겁니다. 당사자도 왔으니, 원활한 파기를 위한 이야기는 오토즈키양과 단둘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제쪽에서 할 말은 이걸로 끝입니다."

차기 가주의 빠른 해산령. 소위 어르신들이라 불리는 노인들은 재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지막까지 남은건 증조할머니였고, 그녀가 담배향을 남기곤 사라질때까지 오토즈키는 네무이의 옆에서 고갤 숙인채 가만히 있었다. 묘한 적막속에 네무이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내가 미운가요?"
"...네. 밉습니다."

너무 미워서, 제대로 혼인하지도 않은 오라버니를 이대로 초야를 치루고 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싶을정도로. 나는 당신이 밉습니다.

차마 뒷말을 내뱉지 못한채, 입술을 꾹 깨물은 오토즈키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오랫동안 품어왔던 오라버니가 밉고,  자신이 갖지 못한 아름다운 사람을 단번에 홀려버린 정체불명의 남자도 밉다. 전부 다 미운데,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서 눈물만이 흘러내린다. 정좌 자세로 앉아있는 그녀의 무릎에 눈물이 한두방울씩 흘러내리자, 네무이는 한숨을 내쉬고픈 마음을 삼키며 제 하오리 자락으로 눈물을 훔쳐주었다.

"어떻게 하면 날 포기해줄건가요?"

다정한 목소리로, 저 붉은 입술에서 나온 말이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다. 웃고있는데도 자신과 똑같은 회색의 눈동자엔 자신이 비춰지지 않아. 이 사람의 눈동자 속 회색 세계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비춰지고 있겠지.
질투심. 그리고 가질 수 없는 상대를 향한 독점욕. 오토즈키는 이내 활짝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마냥 활짝.

"사랑해요."
"...오토즈키."
"아,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전 오토즈키 스즈네, 당신의 아내."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듯 종달새마냥 재잘거리며 네무이의 양 손을 낚아채듯 잡아버렸다. 그걸로 움직임을 봉해버린채, 오토즈키는 네무이의 입술을 훔쳤다. 하지만 이 입맞춤은 정말 가볍게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만 하는 버드키스였기에, 네무이는 제 손이 낚아채였을때의 당황을 금새 갈무리하곤 눈을 감았다. 입맞춤은 애당초 길지도 않았다.

"…겨우, 이게 끝?"
"혹시 이 이상을 바라신건가요? 네무이 오라버니는 욕심도 많은 분이셨네요!"

꺄르륵 웃는 그 모습에 네무이는 쓴 웃음을 흘리곤 오토즈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밝고, 귀여운 사촌동생일뿐인 이 아이에게 유독 유해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다.
한숨을 폭 내쉬곤, 이내 결심했는지 네무이는 도도한 미소를 안면에 내걸었다. 그리곤 바로 짐승마냥 웃고있는 아이를 덮쳤다. 그건, 반격이였다.

"스즈네가 제 아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일단 이렇게… 였을까.

잡혀있던 손을 가볍게 뿌리친 그는 오토즈키의 양 손목을 위로 향하게 한손으로 제압한채, 반대쪽으론 턱을 붙잡고 입술을 가볍게 깨무는걸로 입을 벌리게 만들어 혀를 그대로 얽었다. 뒤얽히며 간간히 입천장을 훑는 그 폭풍같은 순간에 첫 입맞춤을 방금 한 순수한 아이가 따라갈 수 있을리가 없었고, 차마 목으로 넘기지 못한 타액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 와중에 열기는 커녕,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회색의 눈동자에 오토즈키는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금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걸 닦지도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제서야 네무이는 입을 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이상은 자신도, 저 아이도 무리란걸 잘 알고있기에.

"…하. 겨우 그정도로 절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이였습니까, 오토즈키?"
"…"
"아, 착각 하지 마세요. 전 당신의 장단에 잠깐 놀아나준 것 뿐이고, 그렇게 고대하던 제 첫 입맞춤마저 당신은 절대 아니니까요."

연기의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대로라면 아마 평생 절 속일 수 없을겁니다.

차갑게 말을 던진 네무이는 그대로 하오리를 벗어, 마루에 누워있는 오토즈키의 몸 위에 덮어주곤 그대로 문 너머로 사라졌다.
결국 넓은 방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추억속의 봄을 그리워하며, 하오리를 끌어안은채 숨죽여 울었다. …세상이 무너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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